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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은 길재 선생의 얼이 서린 금오산 채미정(採薇亭), 명승(국가지정) 지정 -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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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시 국가지정문화재 13점으로 늘어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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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9일 [경북제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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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시의 국가지정문화재가 12점에서 13점으로 늘어났다. 구미시 남통동 249번지 소재 채미정이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52호로 지정 고시되었다.
채미정은 고려에서 조선의 왕조 교체기에 두 왕조를 섬기지 않고 금오산 아래 은거한 야은 길재(1353~1419)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영조 44년(1768년)에 금오산 아래 건립한 정자이다.
문화재청의 지정사유에 따르면, 채미정은 멀리 바라보이는 금오산과 채미정 전면의 맑은 계류와 수목들이 채미정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경관미가 뛰어난 명승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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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금오산_채미정 | ⓒ 경북제일신문 | 이에 따라, 채미정의 문화재구역은 8필지, 56,603㎡(세부내역 붙임)이며, 문화재관리단체는 구미시(구미시장)로 지정되었다.
채미정은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하여 1768년(영조 44년)에 건립한 정자이다. 197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전면 보수하였다.
길재는 고려시대인 1353년(공민왕 2)에 출생하여, 1386년(우왕 12)에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박사를 거쳐 문하주서(門下注書)에 올랐으나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태상박사(太常博士)의 관직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선산(善山)에 은거하면서 절의를 지켰다. 1419년(세종 1)에 그가 별세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란 시호(諡號)를 내렸는데 후세 사람들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이라 일컬어 높은 절의와 고매한 학덕을 추모하였다.
채미정의 ‘채미’란 이름은 길재가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것을 중국의 충신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왕조에 충성을 한 고사에 비유하여 명명한 것이다. 계류에 걸친 다리를 건너 흥기문(興起門)을 지나면 우측에 채미정이 있고, 좌측에는 구인재(求仁齋)가 있다. 뒤편에는 길재의 충절을 기린 숙종(肅宗)의 ‘어필오언구(御筆五言句)’가 있는 경모각(敬慕閣)과 유허비각(遺墟碑閣)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채미정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다. 평면은 정방형으로 중앙의 1칸만 온돌방으로 꾸미고 나머지는 모두 우물마루를 깔았다. 온돌방의 사면에는 2짝씩의 들문이 있다. 주상에는 2익공으로 장식하였는데 익공쇠서에는 연봉이 있고 단부는 사절되어 있다. 가구는 5량가인데 퇴량 위에 양봉이 받고, 내진주가 고주인 관계로 퇴량 위에는 접시대공이 높게 솟아 외기를 받고 있다. 귓포 부분은 내부에도 귀한대가 있으며 선자연을 걸쳤다.
구인재는 초익공의 팔작지붕집이다. 평면은 양측간을 3통칸 온돌방으로 꾸미고, 전퇴를 두었으며 중앙 2칸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채미정보다 1년 후에 건립하였으나 20여년 후에 불타버려 재건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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