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11년 2월의 독립운동가 강기동 -안동
|
2011년 02월 08일 [경북제일신문] 
|
|

| 
| | ↑↑ 강기동 지사 | ⓒ 경북제일신문 | 강기동은 서울 명동에서 출생하였으며, 경기도 장단 고랑포(長湍 古浪浦)에서 헌병보조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1907년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과 군대해산이 일제에 의하여 단행되자 뜻 있는 많은 의사들이 항일 무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훈련되지 않고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의병들은 정규군인 관군과 일군에 의하여 속속 체포 사살 당하였다.
이때 강기동이 근무하던 장단에는 의병투쟁하다가 체포된 인물들이 다수 투옥되어 있었다. 그가 옥문을 열어 주어 많은 의병들을 구출할 수 있었으며,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의거의 기치를 내걸게 되었다.
그후 그는 의병 대장이 되어 각지의 의병장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었다. 강기동의 의진은 주로 양주(楊州) 포천(抱川)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그의 주변 일대 특히 경기도의 양주 포천을 위시하여 삭령(朔寧) 마전(麻田) 황해도의 토산(兎山) 금천(金川) 재령(載寧) 등지에서는 연기우(延基羽) 전성서(田聖瑞) 이한경(李漢京) 등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강기동은 연기우의 의진과 서로 비밀 연락 아래 밀착된 전략을 전개하였다.
연기우는 군인 출신 의병장으로서 군대 해산 직전 강화도 진위대(鎭衛隊)에서 봉기하여 가장 장기간 투쟁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이들은 이미 현상금이 걸린 사람들로서 밀정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부대를 소수 정예부대로 편성하였다.
1908년 이은찬(李殷瓚)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접하고 6월에 강기동은 남학서(南鶴瑞) 오수영(吳壽泳) 임명달(任明達)과 함께 격문을 띄우고 병사를 모아 대일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을 맹서 하였다.
10월 22일 포천으로 들어가서 1910년 2월 포천에서 왜병과 접전하였다. 이 시기에 강기동 의진의 좌군인 전성서(田聖瑞) 휘하의 한인수(韓仁秀)와 김순복(金順福)은 포천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유죄선고를 받았다.
3월 6일 강기동은 이용규 등과 더불어 영평(永平)으로 들어가 활약하니 일인들은 현상금을 천냥으로 올렸다. 4월 29일 강기동은 전성서와 함께 양주(楊州)에서 적군과 교전하였으며, 5월 16일에는 양주 노원(楊州 盧原)에서 교전하였다. 5월 27일 서울로 잠입하려다가 체포되었으나 순사를 넘어뜨리고 피신할 수 있었다.
이즈음 강기동은 강두필(姜斗弼)과 함께 병력 1백여 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강원도 일대를 넘나들었다.
1910년 8월 29일 소위 한일 합방 후 일제는 11월 25일부터 12월 20일에 걸쳐 임시 파견대 1개 대대와 헌병 경찰대의 연합 병력으로 경상도 일월산(日月山)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安東) 예천(醴泉) 영춘(永春) 봉화(奉化) 일대에 대한 포위 작전을 전개하여 의병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910년 9월 하순에서 11월 초순에 이르는 40일간에 걸쳐 황해도내 1개 여단(旅團) 병력을 집중하여 대살륙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같은 의병부대에 대한 작전과 아울러서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소속 애국 계몽운동가들의 거점을 소탕하였다.
일이 이렇게 급진전되어 가자 상당수의 애국지사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만주 북간도로 이동하였다.
이즈음 강기동은 계속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그 후 북간도로 이동해 가던 중 1911년 2월 원산(元山)에서 체포 압송되어 서울 용산(龍山)에서 총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
경북제일신문 기자 “밝은 생각 / 좋은 소식” - Copyrights ⓒ경북제일신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
|
경북제일신문
기사목록 | 기사제공 : 경북제일신문
|
|
|
|

|
|
실시간
많이본
뉴스
|
|
|
|
|